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군 (문단 편집) === [[동유럽]] === [[파일:external/imgix.scout.com/1592904.jpg]] 킵차크족의 칸 코텐은 킵차크족 생존자들을 규합해 [[헝가리]]의 벨라 4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하지만 몽골은 수만 명이나 되는 투르크족들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더불어 헝가리 평원에 광대한 목초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투는 계속 서쪽으로 진군했다. 당시 유럽인들의 주력은 중장기병이었다. 흔히 유럽인들이 몽골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십자군 전쟁]]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유럽의 기사들은 중장갑에서 비롯된 강력한 충격력을 갖춘 막강한 돌파력을 자랑했다. 아랍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기사단의 돌격은 마치 쏘아진 화살과 같아서, 이들이 돌격을 시작한 이상 막아내기 힘들어 단번에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들의 충실한 철갑류는 화살에 대해서도 뛰어난 방호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몽골군과 비슷한 유목민적 전투법을 쓰는 이슬람군도 전투를 결정짓는 단계인 개싸움으로는 감히 함부로 대적하지 못했다. 이는 [[보두앵 4세]]의 활약상과 용맹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강캐도 쓰는 사람이 관건이듯 결과적으로 몽골군에게 연전연패하고 말았는데, 몽골군이 이들을 상대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포, 투석기, 불화살(재료의 특성상 여러 부가적인 효과가 있었다.)등 단순한 화살 이상으로 강력한 투사무기로 공격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교 우위라고 할 수 있는 경무장으로 인한 기동력과 지구력을 이용해 추격하는 기사들이 지칠때까지 후퇴유인하다 마침내 탈진하면 역으로 반격을 가한 것이다. 단순한 위장 퇴각, 포위 섬멸 등 초원전술을 적절히 활용하여 적의 약점을 찌른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이 동유럽 장교단의 능력부족으로 인해 두 번째 방법만으로도 쉽게 무너졌다. 그 전까지 이들은 전투력이 높은 소수+@들이 싸우는 게 전쟁의 주류라 조직력과 관련 노하우가 필요한 대규모 전투를 많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 [[파일:external/deadliestblogpage.files.wordpress.com/1-mongol-and-pole.jpg]] 바투는 군대를 넷으로 나누었다. 바투의 목표는 헝가리였다. 바이다르는 북쪽으로, [[구유크]]는 남쪽을 경유하도록 했고, [[카단]]은 [[폴란드]]와 독일로부터 건너올 원군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당시 폴란드는 분할공국 시대로, 나라 전체가 내전으로 사분오열되어 제정신이 아닌 상황으로 국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카단의 병력이 폴란드를 황폐화시키면서 크라쿠프로 향하자 볼레슬레프 4세는 가족들과 패물을 챙겨 모라비아로 달아났다. 시장인 블라디미르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근위대와 함께 몽골군에 맞섰고 타타르인들이 이들을 살육하는 동안 시민들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사방에서 닥치는 대로 살육을 행하며 피난민을 발생시키고 공황상태를 야기했다. 크라쿠프를 함락시킨 카단은 브로츠와프를 우회하여 실롱스크로 향했고, 1241년 그곳에서 동유럽 땅에 발을 들인 이래 처음으로 군대다운 군대를 만났다. 실롱스크의 헨리크 2세 포보즈니[* Henryk II Pobożny, Pobożny는 [[폴란드]]어로 '경건한'이라는 뜻이다.][[카단]]은 [[폴란드]]와 독일로부터 건너올 원군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당시 폴란드는 분할공국 시대로, 나라 전체가 내전으로 사분오열되어 제정신이 아닌 상황으로 국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카단의 병력이 폴란드를 황폐화시키면서 크라쿠프로 향하자 볼레슬레프 4세는 가족들과 패물을 챙겨 모라비아로 달아났다. 시장인 블라디미르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근위대와 함께 몽골군에 맞섰고 타타르인들이 이들을 살육하는 동안 시민들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사방에서 닥치는 대로 살육을 행하며 피난민을 발생시키고 공황상태를 야기했다. 크라쿠프를 함락시킨 카단은 브로츠와프를 우회하여 실롱스크로 향했고, 1241년 그곳에서 동유럽 땅에 발을 들인 이래 처음으로 군대다운 군대를 만났다. 실롱스크의 헨리크 2세 포보즈니[* Henryk II Pobożny, Pobożny는 [[폴란드]]어로 '경건한'이라는 뜻이다.]은 몽골인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영지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각지에 원군을 요청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했고 보헤미아 왕으로부터 원군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보헤미아군보다 카단이 먼저 도착했고 헨리크는 보헤미아군의 도움 없이 싸워야 했다.[* 몽골의 병력은 1개, 혹은 2개의 투멧으로 8천~2만 정도였고, 폴란드 측은 역시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과거 제임스 채임버스를 비롯한 사가들은 헨리크의 병력을 대략 2만 5천 내외로 추정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2천~8천 정도였다는 주장도 제시되고 있다.(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Legnica) 현재는 서로 8천 내외로 폴란드군이 적거나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4월 9일 양군은 레그니차 평원에서 격돌했고, 몽골군은 "또!" 위장퇴각에 이은 포위전술로 폴란드군을 전멸시켰다. 연합군이 움직임과 진형만 견고히 하였어도 있을수 없었겟지만. 헨리크는 전사하였고 전투에 참가한 기사들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몽골군은 전사한 폴란드 군의 시체에서 전리품으로 귀를 모두 잘랐으며, 특히 헨리크는 머리가 잘린 뒤 창끝에 꿰였다. 그러나 레그니차 전투에 참여한 몽골군 또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일설에 의하면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튜튼기사단]]의 병력 또한 참여했다고 하는데, 기사단들, 특히 '''[[튜튼기사단]]의 참전 여부는 교차검증을 통과하지 못해 크게 의심받는다.''' 다만, 당시 헨리크는 그야말로 모을 수 있는 병력이란 병력은 달달 긁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 기사단]]이 소수 참여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심지어 '''광산의 광부들을 무장시켜 전장에 내보낼 정도였다.''' 이 광부들은 포로로 잡혀 바투의 사유지에서 부역에 시달리게 된다. 레그니차 전투는 끝났지만 보헤미아 원군은 건재했고, 몽골군은 보헤미아 군대의 참전을 막기 위해 폴란드 남부와 중부를 약탈하다가 헝가리의 본대와 합류한다. 폴란드 내에서는 몽골의 폴란드 침공을 [[대홍수(역사)|대홍수]]와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빗대어 표현할 정도다. 덕분에 북부에서 자라나고 있는 튜튼기사단에 대한 견제를 더더욱 할 수가 없었고 이미 나라가 분열되어 있던 폴란드는 몽골의 침공으로 치명타를 맞았고, 여기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들의 견제까지 겹치면서 이후 폴란드는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 워키에테크[* Władysław I Łokietek, Łokietek은 폴란드 어로 '팔꿈치'를 뜻하는 워키에치(łokieć)에서 온 말로, 워키에테크의 키가 다른 이의 팔꿈치만하였다는 뜻이다.]가 집권하여 다시 폴란드를 통합할 때까지 완전히 개박살난 형태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2069e9c2993efd2592a785f74f428c6.jpg]] 훗날 [[발슈타트 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는 [[군사학]]에서도 나름대로 의의를 가지는데, 기동력과 조직력의 우위를 살려 화력과 개인 단위의 전투능력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를 제압했기 때문이다. 몽골은 [[중장기병]]의 갑주를 둔하고 무능한 겁쟁이들의 산물로 치부하기까지 했지만 상술했다시피 프랑크인들의 기사단은 오히려 매우 강력한 전사들이었다. 몽골군 또한 중장기병을 운용하기는(통상 20~40%)했으나, 이시기까지 몽골군의 중장기병은 유럽의 기사들과 비교하면 가벼운 경장기병에 가까웠고 운용면에서도 유럽인들의 운용방식인 충격기병과는 많이 달랐다. 결정적으로 몽골군이 승리한 주 원인은 '장교단들의 능력부족'이다. 또한 카이두는 폴란드군을 포위한 후 화약무기를 쏟아부었는데, 이 무기는 연기와 악취를 일으켜 시야를 제한하여 일부 폴란드군이 적의 계략을 염려해 퇴각하게 만드는 효과도 보였다. 이 일은 기존의 몽골인들에 대한 소문과 겹쳐져 '''"몽골인들은 말 뿐만 아니라 용까지 길들이고 있는 악마들이다"'''라는 소문이 퍼지는 계기가 된다. 참고로 헨리크가 전사한 장소에는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19세기 폴란드를 분할한 [[프로이센]]은 이 수도원을 군사학교로 만들었고 600년 전 그곳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 숱하게 강의했다. 폴란드 침공과 동시에 몽골 제국군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보헤미아 왕국]] 또한 침공했다. 보헤미아의 왕이였던 벤체슬라우스 1세는 작센인과 투링기아인을 모집해 대응했다. 몽골 제국군은 우선 오토무호프[* 현재는 폴란드령이다.]를 공략했으나 실패하였고, 소규모의 분대가 글라츠를 침공하였으나 역시 실패한다. 그러자 올로모우츠를 공격했지만 결국 지휘관까지 포로로 잡히며 실패했다. '''이는 유럽군이 몽골군을 상대로 이긴 최초의 전투였다'''. 다만 이후에도 소규모의 접전은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바투의 본대는 헝가리로 순조롭게 진군하여 1241년 벨라 4세의 군대와 교전했다. 몽골군은 페스트 근처를 약탈하며 헝가리군을 자극했고, 프레드릭 공작이 이를 격퇴했다. 이후 벨라 4세는 몽골군 전위대를 격파하며 사요 강까지 군을 전진시켰다. 4월을 전후로 헝가리군은 사요강까지 진출하였는데, 헝가리군은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강 건너편에는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 본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에는 양쪽 모두 7, 8만 이상으로 추정했으나 20세기 후반부터는 2만 5천 ~ 3만 정도로 잡고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Mohi] 벨라 4세는 어찌되었든 근처에 몽골군이 있다고 가정하고 보급품 수레를 사슬로 연결하여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였고, 몽골군 척후병들이 도강을 유도하는 데에 끌려가지 않았다. 4월 11일, 헝가리군은 별동대를 보내 야간에 7km를 전진해 몽골군 진지를 기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새벽, 몽골군 또한 헝가리군 진지에 야간 기습을 하기 위해 강을 건넜고, 양군은 사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바로 직전에서 맞부딪친다. 활을 겨냥할 수 없는 야간인데다 먼저 강을 건너 배수진 상황에 처한 몽골군은 그 특유의 기동력을 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중무장한 헝가리군과 맞서 싸우는 상황에 처해 결국 다리를 내주고 철수했으며, 헝가리군은 다리를 점거한다.[* 이때까지도 헝가리군은 몽골의 본대가 온 걸 모르고 있었다. 전투에 참가했던 칼만 왕자는 그 사실을 깨닫고 벨라 4세에게 군을 움직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투는 그 사이에 별 방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도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몽골군은 계획을 바꾸어 수부타이가 별동대를 이끌고 후방으로 돌아들어가 강을 건너 헝가리군 본영을 공격하고, 그 사이 바투는 남은 부대로 다리의 헝가리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포위망을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바투가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한 탓에[* 이것 때문에 나중에 바투가 수부타이에게 "그대가 미적거린 탓에 내 부하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라고 불평했다. 그러자 수부타이는 "그게 아니라 당신이 너무 빨리 움직인 거겠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바투는 자신의 실책이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헝가리군과 정면대결을 해야 했다. 게다가 군을 둘로 나눈 탓에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헝가리군의 석궁에 대응해 바투는 7대의 투석기(혹은 노포)를 동원했으나, 전 병력을 동원한 벨라 4세의 맹공에 바토르 30명과 부관인 바카투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수부타이의 별동대가 도착해서 후방을 찔렀고 몽골군이 불화살로 응전하자 헝가리군은 포장마차[* 헝가리군은 보급에 쓰인 수레를 쇠사슬로 연결해 진지를 구축했는데, 상당한 방어력이 있었다. 포장마차를 공격하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은 몽골군은 이를 하나의 요새로 간주하여 공성무기를 동원해 공략했다. 포장마차는 헝가리군에게 효과적인 방호를 제공했으나 동시에 행군속도를 떨어뜨린 양날의 검이었다. 다만 몽골군의 주 편제가 기병이고 딱히 강력한 투사무기(화약이나 타르, 송진 등을 이용한)를 많이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간의 포장 마차진은 기병에 대적할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이었다. 몽골군은 공성무기가 없었다면 엄청나게 고전하고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강력한 투사무기 혹은 충격력을 가진 부대가 없다면 기병으로 마차 같은 장애물을 돌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 삼국지의 대군전투와 후스 전쟁 등 전투에서 마차 방진은 대기병 상대로 효율적인 효과를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얀 지슈카]] 참조.] 로 후퇴해 저항을 계속했다. [[파일:external/deadliestblogpage.files.wordpress.com/crusaders10kt8ni7.jpg]] 피해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바투는 몽골군의 장기인 추격섬멸까지 포기할 생각도 했으나 수부타이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헝가리군 포장마차 진지까지 공격했고 이것도 쉽지가 않아 마찬가지로 공성무기까지 동원해 겨우 파괴하고 포위망을 느슨하게 하여 헝가리군의 도주를 유도하자 기동력 격차를 감안하지 못하고 도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헝가리군을 끝까지 밀어붙여 궤멸시켰다. 헝가리군은 우골린 대주교가 전사하고 칼만 왕자가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벨라 4세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 코텐은 몽골군이 도착하기 한참 전에 죽었다. 벨라 4세가 그를 중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위협을 느낀 기득권층에게 살해당한 것. 이에 분노한 킵차크인들은 헝가리 땅에서 한바탕 분탕질을 친 뒤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 갔다.] 그 이후 몽골군은 헝가리와 동군연합 관계였던 [[크로아티아 왕국]]을 다음 상대로 삼았고, 주요도시였지만 무장은 빈약했던 [[자그레브]] 지역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고작 1년 뒤인 1242년, 카단 칸이 크로아트로 피신한 벨라 4세를 잡기 위해 다시 처들어 와 클리스 요새를 포위했지만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라도 무장하고 튼튼하게 손을 보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이 되지 않았다. 이후 귀족들이 벨라 4세의 탈출을 도우면서 몽골 군대는 결국 클리스 요새 함락을 포기하고 [[트로기르]] 방면과 [[스플리트]] 방면으로 찢어져 약탈과 학살을 벌였으나 결국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크로아트군이 결사항전하자 결국 물러난다. 비슷한 시기에 불가리아도 공격했다. 이반 아센 2세의 사망 이후로 급속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던 불가리아를 황폐화 시키려고는 했으나 정복하지는 못하고 조공을 받아내는데 만족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바일로]]가 '''신의 계시로 몽고 놈들을 격퇴시키겠다'''라며 의용군을 조직하여 '''정말 몽골군을 도나우강 이북으로 쫓아내고''' 점차 안정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헝가리를 점령한 몽골군은 또 다른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이였던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북부를 정찰하며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1242년 돌연 헝가리에서 철수함으로써 고금의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본국의 오고타이 칸의 사망 이후 벌어진 후계자 계승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 현재는 반론도 적지않다. 이들 유럽인들에게 있어 몽골군은 어느 날 갑자기 동쪽에서 나타난 미지의 존재들이었다. 13세기 초엽에는 [[프레스터 존]] 떡밥과 엮여 '동방의 기독교 국가'에 대한 환상이 널리 처졌으나 바투의 원정으로 그들이 자신들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럽인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추론해내려 했다. 예를 들어 독일 지방에서는 그들이 [[동방박사]]들의 후예라는 설이 퍼진 일이 있었다. 1164년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기사들이 '동방박사의 유골'로 추정되는(신빙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인골을 가져온 일이 있었는데, 지금 동방에서 온 무리들은 그들의 후손이며 탈취당한 선조들의 유골을 되찾으러 온 것이라는 얘기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마땅히 유골을 돌려줘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것. 또한 몽골인들이 유대인의 후손이며 유대력 5천 년을 맞아 [[다윗]]의 재림을 앞두고 유럽인들을 학살하러 왔다는 풍문도 있었다.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던 이야기는 역시 '''"이들은 인간이 아닌 [[악마]]이며, [[인육]]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악한 존재"'''라는 식의 소문이었다. 편집증적인 (그리고 진위 여부가 심히 의심되는) 몇몇 기록에는 이 악마들이 벌이는 광란의 살육과 그들의 소상한 취미에 대한 서술[* 예를 들자면 노파의 고기를 특히 좋아한다든가, 기독교인 처녀를 사로잡으면 진미인 가슴살은 대장한테 바치고 나머지 몸통은 졸병들끼리 나누어 먹는다든가]까지 곁들여져 있다. 좀 구체적으로 설정을 짜면, '''[[코카서스]] 산맥에 있는 [[타르타로스]] [[지옥]]의 문을 열고 [[무저갱]]에서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나타났으며 '''[[말세]]'''가 임박하였다는 [[종말론]]으로 까지 번지게 된다. 실은 이런 주장들의 상당수는 교묘한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재생산된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유대인에 대한 낭설은 몽골인들을 막아내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나 민심을 선동하여 유대인 세력을 억제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